임진왜란 정유재란 6년7개월에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6년7개월에 전쟁


임진왜란은 2차로 나뉘는데 1차는 임진왜란으로 2차는 정유재란으로 나뉘게 된다.

1592년 4월 13일 ~ 1598년 11월 18일 보통 사람들은 7년 전쟁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년도는 6년 7개월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죽고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위에 즉위하니 14대 왕 선조이다. 


선조 때 조선의 정세는 사화를 겪은 이후에 사림의 내부 분열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이조 전랑의 임명권을 계기로 붕당 정치를 형성하여 세력 다툼을 하고 있어 국방력 약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명종 때에도 사량진왜변과 을묘왜변 등으로 인해서 약탈을 당하고 했지만 선조가 즉위하면서 국방력의 약화가 지속되었고 1580년 대에도 6진의 여진족 중에 야인들이 6진을 침범하여 약탈하기도 하였으며 야인들이 부족들을 이루어 숫자를 증강하고 있었다.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1580년 대 후반에 이탕개의 난을 진압을 한 이후에 1590년 조선의 선조가 정사에 황윤길을 부사에는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낼 무렵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리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조총을 무장시키고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돌아보고 6개월 후인 1591년 선조에게 이야기 하기를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야심이 많은 자이며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인물로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다르게 말하길 "풍신수길은 보잘 것 없는 인물이니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여 전쟁을 준비하여 쳐들어 올 수 있는가 하고 이야기를 했으며 동인인 김성일의 말을 믿고 침입에 대비하지 않는 걸로 판명이 났으며 이율곡의 10만 양병설 주장도 묵살된 채 전쟁의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1591년 이순신은 곡식이나 식량을 비축해두고 그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있어 판옥선과 거북선 등을 건조하게 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조선 제 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제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제 3군 구로다 나가마사 수군 장수 도도 다카도라 , 구키 요시타카 ,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수군장수 등이 침입을 했고 조선 제 1군 선봉장 고니시는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부산성 전투에서 정발이 전사하고 동래성 역시 동래부사 송상현이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전사하기에 이르니 이에 파죽지세로 일본군은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유재란 발생 원인


제 1군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래를 거쳐 동래와 양산 그리고 청도와 대구 그리고 안동을 거쳐 선산과 상주를 거쳐 조령과 충주를 거쳐 여주를 목표로 하여 한양으로 진격했고 제 2군 가토 기요마사 역시 동래와 언양을 거쳐 경주와 영천을 거쳐 신녕 - 군위 - 용궁 - 조령 - 충주 - 죽산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제 3군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김해 - 성주 - 무계 - 지례 - 등산 - 추풍령을 거쳐 영동을 지나 청주- 경기도로 진격하여 단숨에 한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조선 조정은 도순변사를 신립으로 순변사 이일을 각각 충주와 상주로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을 막으려 했으나 육군이 상주에서 조총에 밀려 패하고 신립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 1군을 상대하려 했지만 배수진이 실패하고 신립이 전사하면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기에 이르렀고 개성과 해주를 거쳐 평양성까지 피난한 선조는 의주성까지 피난하였고 선조는 순화군과 임해군에게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하는 반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무렵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첫 해전을 치루었고 옥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첫 승전보를 선조가 받자 도승지를 보내어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삼아 나라에 헌신할 것을 명했으며 이후에도 사천과 당포 당항포 등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육군에서도 일본군 1600명에게 하삼도 연합 육군 5만이 용인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사기가 저하될 무렵 선조는 광주목사 권율을 전라도 절제사로 삼아 육지를 방어하게 하는 한편 이순신을 통해서 바다를 지키게 하는 반면 명나라에서 원군이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7천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 1차 평양성 전투를 치르게 하였는데 조명연합군 7천이 제 1차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육군에서도 새로이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의령 지방에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들을 모집하여 6천의 의병을 끌고 의령지방에서 거병한 의병장으로 정암진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육군을 전멸시키고 승리를 거두어 이에 이순신은 한산도와 부산포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니 일본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명나라 1차 파병한 조승훈이 패퇴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휘하 장수들 수십 명만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돌아갔고 1593년 1월 명나라가 2차 파병을 하여 심유경을 비롯한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 4만 3천명이 압록강을 건너왔고 제 2차 평양성 전투에서 탈환을 한 이후 패한 일본군은 개성으로 퇴각했고 조명연합군이 일본군 4만 1천 명에게 맞서 싸웠으나 벽제관 싸움에서 패퇴하고 조명연합군은 개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에 웅치와 이치 싸움에서도 웅치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를 점령하고 조헌이 이끄는 의병을 격파하고 금산을 점령하면서 이치를 넘어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치에서 권율이 이끄는 전라 감영 관군과 고경명이 이끄는 7천의 의병이 연합하여 이치에서 승리를 거두고 진주성에서는 김천일과 곽재우 등이 의병을 연합하여 싸우니 진주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진주성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었고 1593년에 전쟁이 끝이 나고 1594년~1597년까지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화 협상에서 요청한 것은 조선 8도 중에서 4도를 할양할 것과 명나라의 황녀를 후비로 보낼 것 등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의 심유경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돌아가 칙서와 일본의 왕으로 봉한다는 도장을 보내자 심유경을 돌려보내고 1597년 1월에 정유재란을 일으킴으로서 3년 간 이어졌던 강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유재란으로 재침입한 왜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뉘어 15만을 이끌고 점령하였으나 이에 모함으로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에서 몰아내고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라 부산을 진격하였으나 왜군의 기습으로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고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하여 2만 명의 조선 수군이 전사를 하고 대패하였다. 하여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남은 12척의 배로 왜군에 진격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탁월한 능력과 전술로 왜군을 압박하는 반면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왜군들은 순천 왜교와 울산에 왜성을 짓고 대비하였으나 명나라군 역시 왜군이 침입하자 압록강을 건너 원군으로 파병이 되었다. 1597년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를 거두고 또한 울산성 전투 역시 가토 기요마사와 도원수 권율과 명군이 이끄는 조명연합군 6만 대군이 울산성을 두고 치열하게 항쟁하였지만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해 점령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났으며 왜군은 식량 부족과 군사의 사기 저하로 인해서 철군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후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니 이로써 6년 7개월 간의 전쟁이 끝이 났고 피해도 크게 입게 되었는데

조선은 - 전국토가 황폐화가 되고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경복궁 등이 불에 탔고 농경지가 1/3으로 줄었다.

일본은 - 무리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3세 나이로 병사하자 전국시대가 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물려받아 에도 막부로 시대가 변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 파병으로 국력이 쇠퇴했으며 중국의 여진족에게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고 훗날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다.